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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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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 ==== ||[[파일:Mother-of-the-partisan-1943.jpg|width=100%]]|| || ▲ 소련 예술가 세르게이 바실리에비치 게라시모프의 1943년 작품 <파르티잔의 어머니>. 한 러시아 여성이 마을을 불태우고 있는 무장 친위대에게 당당히 맞서고 있다. || > "모든 장교는 유대인들이 첫째 독일인의 삶의 터전에 대한 권리와 세계에서의 독일인 위상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둘째 우리 민족을 부추겨 세계의 적들과 싸우게 하며 가장 훌륭한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고귀한'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 사이에 근본적 차이란 없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위협을 감지하기 이전에 맺은 관계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정리되어야 한다. 국제적인 유대 볼셰비즘에 대한 우리의 단호한 투쟁을 통해 유대인의 진면목이 분명히 드러났다. 모든 장교는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유대인과의 어떤 관계도 거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그 장교는 '장교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육군에서 퇴출될 것이다. 귀하의 부하 장교들이 이 지침을 숙지하기 바란다." > ---- > - 1942년, 육군 인사부장 루돌프 슈문트 대장[* 슈문트 대장은 국방군 내에서 나치즘 사상에 취해 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1944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폭탄 바로 앞에 있었고,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 의 명령.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79 ~ 180p에서 발췌. 국방군이 특히 [[소련]] 지역에서 인종 청소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던 심리적, 사상적인 이유는, 그들의 관점에서 거수자는 곧 [[빨치산]]이자 [[볼셰비키]]이며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시점에서 보면 이는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지만, 적어도 당대 전선의 독일군에게 이 명제는 참이었다. 나치 독일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유럽의 문화를 좀먹고 독일 제국의 [[배후중상설|등에 칼을 꽂아]], 이길 수 있던 1차 세계대전을 패전으로 몰아넣은[* 1917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망한 후,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유럽 러시아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다. 이 영역은 1941년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점령한 영역만큼이나 거대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은 패하는 그날까지 자국 국경 내에 적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독일 국민들 중에서는 서부전선이 멀쩡하고 동부에서는 이기기까지 했는데 왜 자신들이 패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물론 그런 외연적 팽창과 달리 내부적으로 독일 제국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으므로,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존재였다. 1차 대전 말기 피폐한 생활에 고통받던 국민들은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전쟁을 보이콧하였는데, 전후 반유대주의자들은 시위대와 사회주의자들이 유대인 배후세력의 영향이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를 '''유대-볼셰비즘(Jüdischer Bolschewismus)''' 음모론이라 하며, 대표적인 [[반유대주의]] 유형 중 하나로 꼽힌다.[* 각국에 퍼진 공산주의를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러시아에서 유래한 위조문서인 [[시온의정서]].] 이로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는 점차적으로 동일시되었으며 나치 독일이 들어선 이후 이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소련]]은 그러한 사회주의의 총 본산이었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했으므로 유대인과 [[볼셰비키]]들 역시 쉽게 동일시되었다.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 역시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편견은 전장에서의 생존 위협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파르티잔]] 유격대, 그리고 그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민간인 또한 유대인과 동일시했다. 실제 민족적, 혈통적으로 그들이 유대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격대는 곧 유대 빨갱이였고 유대 빨갱이는 곧 유격대' 였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독일의 [[적]]을 의미했다. 소련군 정치장교가 잡히는 대로 살해할 것을 주문한 1941년 6월 6일의 '[[정치장교 명령]]' 또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동시에 소련과 그 모태가 되는 [[러시아]]와 동유럽 자체도 독일인들이 보았을 때 [[유럽]]이라기보다는 열등한 [[아시아]]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유럽과 아시아는 인위적으로 분리된 대립되는 관계였다. 유럽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에[* 여기서 아시아라는 개념은 시대별로 다르다.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아나톨리아]]만을 의미하였으나 점차 종교적, 문화적인 속성을 띄면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근현대에 와서는 '동쪽, 비기독교, 비과학적, 감정적' 등의 다양한 수식어들이 종합된, '비유럽적'인 유라시아 대륙 국가들을 싸잡는 개념으로 정착한다.] 대응하는 과정에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그렇기에 그 중간에 놓인 러시아와 동유럽과 [[슬라브족]]의 경우, 때에 따라서는 아시아 국가로 취급되었다. 러시아를 '[[몽골]]' 내지는 '[[훈족]]'이라고 칭하거나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들이 '아시아는 란트슈트라세에서 시작한다(Asien beginnt an der Landstraße)'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논리를 반영한다.[* 란트슈트라세는 [[빈(오스트리아)|빈]] 시의 제3구를 지칭한다. [[벨베데레 궁전]]이 있는 등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2차례의 [[빈 공방전]]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 동쪽이 아시아라는 표현은 빈이야말로 유럽의 최전선이며, 그 너머의 [[헝가리]], 그리고 [[오스만]]의 영향을 받은 [[발칸반도]]는 유럽도 아니라고 비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독일인들도 이런 논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아시아와 접한 유럽 세계의 최전선으로 생각했다. 반대로 소련은 유대 볼셰비즘이 지배하는 아시아 국가로 간주되었다. > "...도덕적으로 부패한 열등 민족인 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국방군이 유럽과, 특히 독일을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 ---- > - 독일 육군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1941년 11월 17일 내린 '동부에서의 독일군의 행동 강령'. 호트 상급대장은 당시 남부집단군 소속의 17군 사령관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작전 중이었다.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338p에서 재인용 때문에 사상적, 역사적인 관점에서 독일과 소련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질서를 교란하는 소련과 그 열등한 아시아적 유대-볼셰비키들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했으며, 그 땅은 독일 민족의 정당한 [[레벤스라움]]으로 개발되어야 했다. [[리보니아]]를 지배하던 독일계 기사단의 사례, 러시아 곳곳의 농지를 개발한 [[독일계 러시아인]], 갈리치아와 발칸 반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 등은 독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사례가 되었다. [[폴란드]]의 경우에도 독일의 당연한 영토였으며, 열등인종인 폴란드인들은 계도되어야 했다. 과거 [[폴란드 분할]]을 통한 지배 경험은 독일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공감하던 바였으며 국방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방군은 나치 정부에 의해 찬란한 유럽 문명의 질서와 도덕을 보전한 우등민족의 수호자로 선전되었다.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말한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가 바로 이런 비약적으로 발전한 독일의 인종주의 논리를 잘 보여주며, 국방군 또한 히틀러의 인종주의 논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생각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상으로 무장한 군대가 동진한 결과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종 청소 행위로 나타났다. > '바르바로사 계획'은 처음부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섬멸전쟁을 지향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원칙에 따라 적군을 신속하게 섬멸하고자 했다. 여기서 섬멸은 군사적 관점에서 물리적인 말살이 아닌 전투수단인 지상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작전적 원칙들이 세계정복을 지행하는 전쟁 속에서 유명무실화되거나 도구화되고 말았다. 군부는 1941년 3월 30일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 히틀러는 매우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날 장군들에게, 향후의 전쟁이 서부와 북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통상적인 전쟁'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과거 나폴레옹이 시도했듯 유럽에서 러시아의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영국에게서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소련의 주민들을 말살 또는 노예화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 목표는 앞으로 다가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 목표, 즉 사상적인 '불구대천의 원수', 볼셰비즘과 유대교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휘르터Hürter의 말처럼, 바야흐로 '적군의 섬멸을 지향하던 군사적 개념이 한 국가와 사상의 소멸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 > 이에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금까지 적용된 전통적인 준칙과 규칙들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장군들은 곧 벌어질 전쟁이 인종적, 사상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히틀러의 요구가 지나친 것이었음을 인지했다. 할더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번 전쟁의 양상은 서부 전역과 매우 다를 것이다. 동부 전역은 매우 혹독할 것이며 미래를 위해 이를 참고 견뎌내야 한다." 물론 히틀러가 자신의 계획을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점령정책을 시행했던 친위대의 행동을 목격한 이들은 당시 생활권 확보를 위한 히틀러의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 ---- > - 독일 연방군 게하르트 P. 그로스 대령의《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329p ~ 330p에서 발췌 그렇다면 상술한 인종주의 논리가 독일군의 행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현대 [[독일 연방군]] 군사사 연구소의 [[https://securityanddefence.pl/Author-Gerhard%20P.-Gross/110285|게하르트 P. 그로스(Gerhard P. Groß)]] 대령이 설명한다. 그는 당시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와 독일군의 전통적인 [[작전술]]적 사고가 결합했다고 파악한다. 독일식 작전술의 핵심은 [[기동전]]인데, 이는 단순한 기동뿐만 아니라 기동을 통해 적의 주력을 포위하고, 갇힌 적을 물리적으로 '섬멸(Zerstören)'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후방에서는 그 '적'이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잔이었던 것이다. 딱히 전선이랄 것이 없는 비정규전을 수행하는데다 자생적이기까지 했던 파르티잔의 특성상, 정규군 제대와 같이 뭉쳐 있는 '주력'이라 할 것이 불분명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방군은 나치즘과 아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국방군 지휘부는 제거해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파르티잔의 힘의 근원을 찾아 나섰고 이에 대한 답을 준 것은 상술한 [[히틀러]]의 인종주의였다. 결국 국방군은 파르티잔의 섬멸을 위해서는 인근 마을, 더 나아가 주민들, 그리고 이민족 전체에 대한 섬멸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90년대에 국방군 전시회를 주최했던 독일 사학자 [[https://de.wikipedia.org/wiki/Hannes_Heer|한네스 헤어(Hannes Heer)]]는 이에 대해 "'''파르티잔 없는 파르티잔 소탕전'''(Partisanenkampf ohne Partisanen)이라는 기이한 상황"이라고도 말한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인종적, 사상적 적대감과 급진적인 민족주의 논리가 단계적으로 누적되고, 최종적으로 군사 논리와 결합하여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독재 체제에 결합한 관료제와 전시 상황, 그리고 전선의 불확실성 속에서 하에서 급진적으로 실행된 것이 바로 [[독소전쟁]]이라는 파괴적인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이었다. 독일군은 절멸전쟁을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다시 말해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주민들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집단 학살 행위는 유대인 대학살과도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며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방군 역시 [[홀로코스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에리히 만슈타인]], [[헤르만 호트]], [[발터 모델]] 등, 유명한 독일 장군들 대다수가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이 전후 재판정에서 자신은 비정치적 군인일 뿐이며 학살을 몰랐다고 강변했으나, 실상은 그들 또한 히틀러의 절멸전쟁이 무엇인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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